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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漢陽人(2009-02-11, 18:23 Hit : 638) 
제목
  아하, 아버지 李甲, 그의 따님 李正熙女史 訪問記



西伯利亞에서 불우하게 도라가신 李甲선생의 다만 한낫 혈육인 그 따님 正熙씨와 그의 남편되는 李應俊씨가 현재 서울에 계시단 말을 某氏에게서 듯고 나는 1930년 맑게 개인 첫 가을 어느 공일날 龍山을 차젓다. 李應俊씨는 녯날 한국시대에 陸軍正領(현재의 大佐) 盧伯鱗씨가 교장으로 잇든 武官學校를 다니다가 일본사관학교에 드러가 그곳을 마치고 東京麻布 第3聯隊 사관으로 잇다가 西伯利亞에 영미연합군과 함께 출전을 한 뒤 다시 7,8년 전에 조선에 도라나와 龍山군대에 잇는 터이다.

現職은 陸軍大尉로 보병 제79연대 중대장으로 잇는데 가정에는 李甲씨 미망인과 그의 夫妻와 10살에 나는 昌善이란 아들과 7살에 나는 따님이 잇다. 蒼鬱한 漢江通 수풀 속에 잇는 陸軍官舍로 氏를 차즈니 마츰 문전에는 聯隊로부터 심부름 온 듯한 병정 한 명이 直立不動의 자세로 서서 중대장의 명령을 기다리고 잇섯다.

우리는 조곰 뒤에 간결하게 차린 응접실에 마조 안젓는데 그때에 나의 눈에 처음 비최는 氏는 40이 갓갑다 하는 것이 거짓말일상 십게 아직 훨신 젊어 보엿고 風貌도 전장을 馳驅하며 萬軍을 叱咤하는 그러한 우락부락한 勇將이라기 보다도 佛道나 닭고 안젓슬 듯한 선배다운 분임에 놀랏다.

조곰 잇다가 茶菓를 가지고 드러오는 李甲씨 따님 正熙씨도 30이라 하나 주름살 한 점 업게 맑게 개인 그 얼골로 보아서 훨신 더 젊으신 듯이 보엿다. 더구나 한때는 연설 잘하고 또 一色으로 유명하든 저 李東輝씨 따님과 함께 西伯利亞에 핀 아름다운 두 떨기의 高麗꼿이라고 그 수려한 미모를 內外에 널니 날니든 터이니만치 朝鮮服을 단아하게 차리고 안즌 그 부인은 이 세상에 드물다 할 容色을 가지시엇다.
말이 中東線 뮤린驛으로부터 다시 「니코리스크」에 이르러 李甲선생의 임종 광경에 미치자 부인은 무한히 슬푼 빗을 얼골에 띄이며 이러케 말한다.
 
「아버지가 마즈막 도라가신 곳은 西伯利亞 「니코리스크」市엇슴니다. 그때가 16년 전의 느진 봄날이 되어 창 밧게는 힌 눈이 한고치 두고치 시름 업시 녹아가고 잇는 때에 그만 불치의 병으로 여러 해 고상하시든 아버지는 41세를 一期로 아조 이 세상에서 떠나 버리고 마럿슴니다.

원래 전신이 不隨한<49> 탓으로 사지를 꼼작 놀니지 못하신 것은 물론 말슴조차 잘 번지지 못하여서 아무런 유언도 업섯슴니다. 임종의 병상에는 어머니와 저와 그곳 동포 여러 분들이 와 잇섯지요. 유골는 「니코리스크」를 一目에 俯瞰할 수 잇슬 뿐더러 생전에 그러케도 그립어 하시든 녯 땅을 바라다 보실 수 잇는 뒷산의 白人共同墓地에 모섯지요.

그러고 우리들이 나온 뒤 한번도 성묘라고 못하엿는데 14년 전인가 밧갓 어룬이 西伯利亞로 마츰 出戰을 하섯슬 때 그 무덤을 차저 꼿다발을 드리고 왓다 함니다. 그때 도라가신지 여러 해 되건만 어느 뜻잇는 그곳 형제들이 아직도 차저와 주섯슴인지 무덤가에는 이슬에 저즌 꼿다발 여러 개가 노여 잇섰드람니다. 저는 그 소리 듯고 이곳에서 혼자 울엇슴니다.」
「엇지하시다가 全身不隨까지 되섯슴니까」
하는 나의 질문에
 
「글세요. 저는 어렷슬 때이기 잘 모름니다만은 아버지는 露都 聖彼得堡에 가섯다가 풍토병을 엇으시고 그런 뒤 다시 미국을 건너가실 작정으로 배를 타고 桑港까지 가섯스나 그만 여행증이 문제가 되어서 다시 도로 나오신 뒤 원래 성정이 급하신 분이라 그만 울화가 나는데 신경병을 겸하신 듯...직접 원인은 엇든 날 아츰에 칼로 연필을 깍고 안젓다가 칼끗이 조곰 엄지 손끄락 끗에 다이드니 그만 그 손끄락 끗 緊肉이 자유롭지 못하여지더람니다.

그러더니 손까닭에서부터 주먹으로 주먹에서부터 팔로 그래서 차츰 전신의 緊肉이 伸縮이 업서지며 아조 폐인되다십히 되섯대요. 그런 뒤 伯林, 巴里로 명의 차저 다니며 병 고치려고 가진 애를 다 하섯스나 一向 효험이 업서서 나종에는 中東線랑 『무린』驛에 와 계섯담니다.

그때에 李光洙씨가 上海로부터 오서서 아버지 겻헤 늘 계서 주시면서 이약이 동무도 되어 주시고 편지도 만히 代書하여 주섯지요. 약 한달 동안이나...그 전까지는 제가 편지를 썻지요. 아버지 불느시는 대로요. 그러나 그때는 제<50> 나히도 열사오 밧게 아니 되고 서울 잇슬 때 進明女學校를 겨우 다니엇슬 뿐임으로 편지를 쓰면 얼마나 잘 썻겟슴니까?」
 
「아버지 李甲선생의 성격은 엇더 하섯서요?」
「글세요. 본국 잇슬 때는 나히도 어림으로 그저 무서운 어룬이다라고만 생각하엿지요. 그러다가 西伯利亞에 가서 함께 모시고 잇게 되매 퍽은 多情多恨한 어룬이다.-그러케 생각이 됩데다. 잘 우시고 또 잘 웃스시니까요. 그러고 늘 분개하시는 일은 밧게 나간 조선 사람들이 저것은 平安道패다 이놈은 慶尙道패다 하고 밤밤낫 당파 싸홈이 만하엿지오.

그 일에 제일 분개하여 하시고 또 피차에 肝膽相照하기를 힘쓰시는 모양입데다. 밧갓헤 나간 뒤 제일 절친한 친구는 李東輝 그 어룬이엇는데 그 분과 아버지는 각금 방안에서 책상을 두드리며 아마 이러한 파벌의 시비 때문에 激論하시는 것을 들엇슴이다. 이동휘 그 어룬은 날마다 우리 집에 두 세 차레씩 아니 오시는 때가 업섯슴니다. 실로 생사를 가치 하시는 어룬가치 두 분은 제의 눈에도 비치엇슴니다」
 
「친구를 대단히 조와 하심니까?」
「네 친구라 하면 실로 당신 몸까지 떼어 주실 듯하엿슴니다. 누가 감기라도 아르면 약지어다가 주라 하시고는 아츰 저녁 근심하심이 仝氣의 형제에 못지지 안엇습니다. 더구나 기억에 나는 일은 平安道 肅川의 우리 백부가 西伯利亞에서 우리들이 病苦로 고생한다는 기별을 듯고 아버지 소유로 잇든 肅川 땅 열흘가리를 팔어 2,000원이든가 3,000원이든가 한 돈을 만들어 「니코리스크」에 보내주섯서요.

그것을 병석에 계신 아버지는 그 돈으로 모다 땅을 사서 약 절반은 安昌浩씨 명의로 하여 安선생에게 주고 남어지 거진 절반은 또 그곳에서 사는 柳東悅씨의 아드님 되는 청년에게 주기로 하고 겨우 10分之1이나 되나마나한 것을 당신의 친구 명의로 하엿슬 뿐이엇슴니다. 이밧게도 친구를 위하든 일이 퍽으나 만흐섯서요. 엇재든 한번 사괴인 벗과는 의례 생사를 가치 하실 것만 생각하신 듯 하엿슴니다.」
 
슬푼 생각을 돌니게 하고저 나는 두 분의 결혼 로맨쓰를 청하니 부인은 낫츨 붉히며 含笑而 잠잠하시고 동석하엿든 그의 남편 李應俊씨가 대신 입을 연다. 「그야 이러케 되엇지요. 나의 장인 李甲씨가 西伯利亞에 계실 때 동경의 사관학교에 잇는 나에게 기별이 왓습데다. 그래서 장가들게 되나 보다 하엿지요.

처음 이 사람(부인을 가르치며)을 알게 된 것은 내가 平安道에서 서울로 처음 올나와 水標橋 엇든 여관집에 묵고 잇는데 그 여관집 주인과 親近하시든 모양으로 李甲씨가 각금 놀너 오시더구만. 그러다가 하로는 나를 엇더케 보시고 그러는지 將來 有望한 청년쯤이다 생각하섯는지 딸 둔 아버지 본색으로 사위가음을 엇엇다고(그때 夫婦大笑) 그러시는 격이지 자기 집에 와 잇스라고 합데다.

그 분이 그때는 陸軍大臣副官으로 세력이 당당하든 때엇지요. 그래서 그 집에 가 잇스면서 그 당시는 쪼고마한 이 사람(부인)을 맛나게 되어 갓금 놀다가도 토닥토닥하고 싸홈지거리도 꽤 잘하엿지오. 나는 그때 조선서는 처음 학교라 하든 普成學校 第1期生으로 입학하엿지요.

그러다가 李甲씨 지휘로 무관학교에 1년 동안 잇다가 일본사관학교로 가버렷지요. 그러는 사이에 합병이 되자 그를 전후하여 安昌浩, 盧伯麟, 李東輝씨 등이 해외에 나가고 李甲씨도 행방불명이 되엇다는 신문을 東京에서 보게 되엇슴니다. 그런 뒤 몃 해 뒤에 무린에서 그런 기별을 듯자 얼마 아니가서 우리 둘의 약혼 말슴을 유언 삼아 하시고 도라가섯더람니다.

그때 西伯利亞 出兵이 잇섯지요. 그레서 나는 司令部附로 西伯利亞에 갓든 길에 「니코리스크」에 내리어 하로 밤 자면서 저 사람을 차젓지요. 그랫더니 저 사람도 웬간히 급하엿든 모양으로 글세 나를 차저 벌서 元山인가 어대인가 재 혼자가 나가 잇섯더래요. 스물한살 나는 노처녀엇스니까 한 시가<51> 급하엿든 것도 무리는 아니엇겟스나 하하하......」
 
「아이그 당신이 로총각이 되어 불이야 불이야 서백리아까지 차저 오시군. 호호호」
두 분은 녯날 약혼시대의 달큼한 추억에 상당히 흥분되시는 양 이약이는 다시 계속된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 하로밤 留하면서 장인의 무덤을 차저 성묘하고 그러고 撤軍과 가치 나와서 고향인 平安道 肅川서 예식을 거행햇지요. 그것이 벌서 10년이 되엇슴니다 그려. 인생은 참 빨니 흘너요」
 
「그런데 閔泳徽와의 六穴砲사건이라고 전하는 것이 어듸까지 참말임니까」
「저도 그 일은 잘 암니다. 장인 되시는 분한테서 생전에 수차 이 이약이를 들엇지요. 원래 李甲氏 부친은 平安道서도 屈指하는 큰 재산가엇담니다. 그런데 李甲氏가 소년時 科擧하여 進士가 되었는데 平壤監司로 온 閔泳徽가 李甲씨 부친을 잡어다가 가진 惡刑을 다하며 아들되는 李甲씨의 進士를 거짓 임굼을 속이고 어든 버슬이라고 가진 惡刑을 다하엿담니다.

그래서 부득이 소유하엿든 땅 40日耕, 거기는 一日耕이 5,000평이라니 20만평이지요. 그 큰 땅을 바치고 무사히 나왓드람니다. 李甲씨 생각하니 긔가 막히나 그때야 엇더케 함니까 그 길로 서울로 뛰어 올나와 독립협회에 드러가서 딴 뜻을 품게 되엇더람니다. 그러나 그 독립협회조차 褓負商 란리판에 다 바서지자 이것 저것 다 뿌리치고 일본으로 뛰어들어가 成城中學을 고학으로 다녀 맞추엇슬 때 그때 한국정부에서 일본사관학교에 유학생을 보내게 되어 그 판에 盧伯麟, 金應善 등 제씨와 가치 여덜이 뽑히어 그 학교를 마치고 日露전쟁이 이러나자 滿洲로 觀戰武官이 되어 갓더람니다.

그럴 때에 한국정부에 불니어 군대의 청년사관으로 잇다가 陸軍大臣 副官으로 잇섯지요. 그때 閔泳徽는 輔國이란 顯位에 잇고 軍職으로는 陸軍中將에 잇섯드람니다. 복잡의 念에 불타는 청년사관 李甲은 정말 六穴砲를 사가지고 單身 閔의 집을 뛰어들어가 담판하엿담니다.

녯날 빼아서 간 밧흔 물론 10여 년 간 추수하여 먹은 그 돈을 전부 내노라고. 그래서 죽인다 살닌다 하는 말이 만엇는데 閔은 정말 신변의 위급을 생각하엿든지 몰내 上海로 도망하엿슴니다. 그런 것을 李甲씨가 上海까지 또 따라가 그 땅을 도로 찻기로 맹세 밧고 붓잡고 귀국하엿지요. 그 돈으로 西北學會와 저 五星學校을 세웟지요. 엇잿뜬 그 분은 퍽으나 격정적이고 지략이 잇서 보엿슴니다.」
 
그리며 그 박게 여러 가지 이약이를 들려 준다. 나는 아츰 11점이 좀 지나서 가서 오후 3점이 넘도록 부인께서 손소 차려주시는 점심까지 대접 밧으며 장시간 말슴을 들엇다. 내가 이러서려할 때 부인은 아버지 말슴을 다시 하시며 언제든지 기회를 어더 「니코리스크」로 아버지 展墓가시겟다고 한다. 그의 얼골 빗에는 불우하게 도라가신 육친을 생각하는 진정에 가득 찻섯다.

삼천리 제9호(1930년 10월 01일)  
漢陽學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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